4. 감정이 사라진 관계, 나를 지우는 방식
처음엔 나도 몰랐다. 아니, 애써 모른 척했다.
그 사람과의 관계 속에서 나는 점점 말이 없어졌고,
감정 표현도 줄었다. 말하면 부정당하고,
표현하면 깎이는 일이 반복되다 보니,
자연스럽게 침묵하게 됐다.
친구는 감정을 논리로 덮었다.
내가 기뻐하거나 슬퍼할 때마다,
감정보다 '해야 할 일', '할 수 있는 수준',
'부족한 이유'를 먼저 얘기했다.
감정은 늘 후순위였다.
기쁘다고 말하면,
"그거 가지고 좋아해?"라고 되돌아왔고,
힘들다고 하면,
"그건 핑계지. 더 할 수 있어."라고 단정지었다.
결국 나는 말하지 않게 됐다.
말해봤자 의미 없다는 걸 학습해버렸다.
나 스스로도 내가 느끼는 감정이 틀린 건 아닐까,
이상한 건 아닐까 의심하게 됐다.
가장 큰 문제는,
그게 쌓이니까 감정이 무뎌진다는 거였다.
무뎌지니까 더 이상 기쁘지도 않고, 화도 안 났다.
단지 해야 할 일을 하듯, 관계를 유지했다.
로봇처럼.
웃지 않게 됐고,
짜증도 내지 않았다.
항상 조심하고, 계산하고, 맞춰가는 삶.
그게 너무 당연해졌다.
그 사람의 기분을 먼저 살피고,
상황을 먼저 생각하고,
내 감정은 뒤로 미뤘다.
내가 어떤 사람인지 잊어갔다.
웃는 걸 좋아하고,
소소한 일에도 감동하던 내가 점점 사라졌다.
내 감정에 반응하지 않다 보니,
내 안의 나조차 조용해졌다.
한 번은 정말 크게 속상한 일이 있었다.
그때도 말하지 않았다.
말해봤자 돌아오는 건,
"그 정도로 흔들려서 되겠어?"였다.
이미 내 안에 '말해봤자 소용없다'는 학습이 자리잡고 있었다.
그게 참 무서운 거였다.
어떤 관계든, 표현하지 않으면 부식된다.
감정은 썩고, 결국 고장이 난다.
나도 그렇게 망가졌다.
그 사람은 나를 성과물로 봤다.
감정이 아니라, 성과로.
내가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지보다
뭘 해냈는지에만 집중했다.
실패는 곧 실격이었고,
감정 표현은 약함의 표시로 간주됐다.
그래서 난 점점 아무 말도 하지 않게 됐다.
그 사람 옆에서는, 내가 없는 듯 행동했다.
그리고 문득, 이건 친구가 아니구나 싶었다.
친구는 기쁠 때 같이 웃어주고,
아플 때 같이 아파하는 사람이라고 생각했었다.
그런데 나는 늘 시험 보는 기분이었고,
평가받는 존재였다.
이건 관계가 아니었다.
감정을 공유하지 않는 관계는 그냥 계약이었고,
내가 일방적으로 내주기만 하는 구조였다.
나는 나를 지우고 있었다.
그리고 어느 순간,
나는 나를 전혀 알아볼 수 없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