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이야기들

5. 조용히 스며든 굴레의 시작

꾸사장 2025. 6. 11. 08:39

그 친구와의 첫 만남은 고등학교 2학년 때였다.

친구의 반 친구였고,

그냥 다 같이 어울려 노는 사이였다.

 

 

특별히 친하지도, 멀지도 않은 애매한 거리.

졸업하고 각자 길을 가면서 자연스럽게 멀어졌지만,

연락은 끊기지 않았다.

 

 

그리고 20대 중반.
그냥 아는 사이였던 우리는 다시 가까워지기 시작했다.

직장생활로 지쳐가던 시기였다.

 

 

마침 서로 옆 동네에 살고 있었고,

퇴근 후 맥주 한 잔 하다 보면 하소연도,

인생 얘기도 자연스럽게 이어졌다.

 

 

매주 만나다시피 하면서 우린

‘친구’라는 이름을 붙이기에 충분한 시간을 보냈다.

 

 

그 친구는 늘 자신감이 넘쳤다.
고등학생 때도 그랬다.
공부든 운동이든 반 친구들 사이에서

“쟤는 원래 잘하잖아”라는 말이 나올 만큼.

그리고 지금도 마찬가지였다.

 

 

 그 친구는 회사를 다니며 만든 본인의 사업이 잘되고 있다고 했고,

주변 친구들조차 “쟤니까 당연하지”라고 말하곤 했다.

그 시점부터 친구는 주변 모든 사람들에게 같은 말을 반복했다.

 

“직장인 월급으론 절대 부자 못 돼.”
“중소기업에서 평생 살아남을 수 있을 것 같아?”
“사업해야 돼. 나처럼.”

 

 

처음엔 흘려들었다.
솔직히 좀 과장하는 것 같기도 했고,

나는 그냥 안정적인 직장인 생활을 하고 있었으니까.

 

 

하지만 3년차가 되던 해.
그 말이 귓가에 이상하게 오래 남았다.

 

 

나는 당시 한 중소기업에서 기술교육을 맡고 있었다.
교육자료를 만들고,

기업을 찾아다니며 강의하는 일이었다.

 


출장은 잦았고, 스케줄은 지옥이었다

하루에도 몇 시간씩 운전하며 전국을 돌았다.

항상 새벽에 나가고, 밤 늦게 돌아왔다.

 

 

그러면서 몸은 계속 망가졌고,

반복되는 루틴에 지쳐갈 무렵 팀 사수가 출산휴가를 갔다.

그리고 나는 두 사람의 일을 몇 달간 혼자 떠맡았다.

 

 

그때부터 ‘이러다 진짜 죽겠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바로 그때, 그 친구의 말이 스며들었다.
정확히, 깊숙하게.

 

 

결국 난 퇴사를 결심했고,

친구의 제안대로 그의 집에서 출퇴근하며 창업 실험에 뛰어들었다.

하나에 50만원, 많게는 100만원 정도 드는 소자본 아이템들.

 


앱을 만들어 보기도 했고,

펀딩 플랫폼에 아이템을 올려보기도 했고,

옷을 제작하려고 2달내내

동대문과 면목동을 매일같이 돌아다니기도 했다.

 


결과는 예상한대로 다 실패했다.

하지만 그땐 괜찮았다.
적어도 내 힘으로 뭔가를 해봤다는 성취감은 있었으니까.

 

 

진짜 문제는 친구의 집에서 출퇴근을 했던 1년이었다.

그는 나를 매일 눌렀다.
말은 조언처럼 포장됐지만, 날카로웠고, 일방적이었다.

 

 

“너는 진짜 직장인 마인드 그대로네.”
“그러니까 평생 그렇게 사는 거야.”
“내 말만 들으면 된다니까? 그걸 왜 못 해?”
“니가 계속 직장인처럼 굴면 내가 도와줄 수가 없어.”

 

 

처음엔 날 위해서라고 믿었다.
조금 거칠긴 해도 진심이라 여겼고,

그 말들 하나하나를 곱씹었다.

 

 

하지만 어느 순간부터,

내 머리는 멈춰 있었고, 내 입은 대답만 하고 있었다.

 

 

그의 말이 내 판단이 되었고,

나는 점점 순응하는 사람이 됐다.
자발적인 척, 자율적인 척했지만 사실은 아니었다.

 


나는 그 관계 안에서 스스로 목줄을 조여간 거였다.

그리고 1년쯤 지났을 무렵,

그는 조용히 계약서를 내밀었다.
아무 설명도 없이.

당연하다는 듯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