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리합의서를 손에 쥔 채
약속 장소로 향했다.
걸음을 옮길수록
심장이 빨라졌고,
손끝은 계속 차가워졌다.
사인을 받아내기 위해
이 자리에 나가야 한다는 걸
머리는 알고 있었지만,
몸은 자꾸 뒤로 당겨졌다.
‘지금 돌아갈까?’
‘괜히 대면하지 말고 메일로 보낼 걸 그랬나?’
수십 번 고민했지만
결국,
나는 나아갔다.
테이블 너머로 앉은 친구는
예상한 그대로의 얼굴이었다.
아무것도 모르는 듯 웃고 있었고,
내 눈치를 보지도 않았다.
“그래서 요즘 좀 힘들다며?
근데 너도 알잖아,
사업하다 보면 이 정도 리스크는 다 있어.
그걸 버티는 게 실력이고.”
나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친구는 이어서 말했다.
“사실 너가 내 말 안 들으니까 이렇게 된 거야.
예전에 내가 방향 틀자고 했을 때 들었으면
지금 이런 상황 안 왔지.”
그리고 마지막엔 이렇게 말했다.
“너 이래서 부자 못 되는 거야.”
한 문장, 한 문장
예상한 그대로였다.
나는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그저
조용히 힘들어하는 척,
모든 걸 내려놓은 사람처럼
말없이 눈을 피했다.
‘이 사람, 다 말하게 둬야 해.’
나는 머릿속에서
언제 정리합의서를 꺼낼지 타이밍만 보고 있었다.
친구가
할 말은 다 한 것 같을 때,
숨이 조금 가라앉은 그 틈에
입을 열었다.
“내가 요즘 계속 생각했거든.
이 계약서가…
내겐 마음의 짐이었던 것 같아.
정리는 해야 할 것 같더라고.”
그 말을 마치고
나는 가방에서
정리합의서를 꺼냈다.
친구는 그걸 보며
조금 멈칫하더니
이렇게 말했다.
“계약서?
그거 그냥 너 열심히 하라고,
다짐하라고 썼던거였어.”
나는 순간
속에서 뭔가 올라왔다.
하고 싶은 말이 너무 많았지만
입을 다물었다.
‘이건 감정으로 나설 일이 아니야.
내가 나를 지켜야 하는 일이야.’
그저
단호하게 말했다.
“이 내용대로,
정리하고 싶어.”
친구는
문서를 쭉 훑어보더니
의외로 쉽게
펜을 꺼내 사인했다.
그 순간
내 손끝의 떨림은 사라졌다.
그리고 친구는
말없이 문서를 내밀며 이렇게 말했다.
“그래도 밥이나 먹고 가자.
오랜만에 봤는데.”
나는 웃지도 않고
그냥 짧게 말했다.
“오늘은 좀 피곤해서…
다음에.”
집으로 돌아오는 길.
세상은 평소처럼 시끄러웠는데
내 안은 이상할 정도로 조용했다.
그날따라
하루가 너무
평온했다.
📌 첫 글부터 읽기
1. 친구라는 이름으로 가스라이팅을 당했고 그 수렁을 빠져나온 이야기(서문)
사람들은 종종 말한다.“넌 참 착한 사람 같아.” 그 말을 들을 때마다 나는 어딘가 기분이 이상했다.왜냐하면, 나는 그 말이 칭찬처럼 들리기보단,“그래서 더 참고, 더 버티고, 더 이해해줘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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