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친구와의 관계가 계속될수록,
나는 점점 나를 잃어갔다.
내가 어떤 사람인지, 뭘 좋아하는지,
무엇을 위해 노력하고 있는지조차 점점 희미해졌다.
친구는 늘 기준을 들이밀었다.
그 기준은 구체적이진 않았지만, 엄격했다.
"이건 누구나 할 수 있는 수준이야. 너는 더 잘해야지."
그 말에 처음엔 속이 상했다.
하지만 그 감정마저 오래 가지 않았다.
"그래, 내가 부족하니까 그런 말 듣는 거지."
그렇게 납득해버렸다.
나는 평가받기 위해 살고 있었고,
그 평가의 기준은 내가 만든 게 아니었다.
하루하루가 시험 같았다.
뭘 해도 부족했고, 뭐든 더 해야 했다.
작은 성과에도 기뻐하지 못했다.
기뻐해도 되는 순간에 항상 그 친구는 어김없이 나를 눌렀고,
나는 그 기쁨이 잘못인줄 알고 억눌렀다.
내가 아무리 최선을 다해도
친구의 한 마디로 내 노력은 무의미해졌다.
친구는 내게 말했다.
"넌 아직 멀었어. 이 정도 가지고 뭘 좋아해. 넌 더 해야 해."
그 말이 나를 찔렀다.
동시에, 나를 조종했다.
그렇게 살아야 한다고 믿게 만들었다.
그리고 나는 정말 그렇게 살았다.
하루하루를 증명하려 애썼다.
하지만 그 누구에게도, 무엇도 증명되지 않았다.
특히 괴로웠던 건,
내가 무언가를 잘했을 때조차
기쁨을 느끼지 못하는 점이었다.
왜냐면 그건 나의 기준이 아니었으니까.
그 사람의 기준이 만족되지 않으면 아무것도 아닌 게 되었다.
그 사람은 나를 인정하지 않았다.
아니, 인정하는 순간이 없었다.
늘 더 높이, 더 많이, 더 빨리. 그 말만 반복됐다.
나는 점점 내 감정을 의심하기 시작했다.
내가 느끼는 만족이 틀린 건가?
내가 기뻐하는 건 의미가 없는 건가?
그렇게 자존감이 무너졌다.
더 잘하고 싶은 욕심은 있었지만,
더 잘해도 달라지지 않는 현실에 점점 무뎌졌다.
사실 나도 알고 있었다.
누구나 할 수 있는 게 아니었다.
내가 해낸 것들이 있었다.
그런데도 나는 늘 내가 별게 아니라고 느꼈다.
왜냐하면, 내 앞에 있는 사람은 늘 그걸 깎았으니까.
이제 와서 생각해보면,
나는 그 사람의 말로 자존감을 재단받고 있었다.
그 사람의 말이 기준이고, 그 사람의 말이 칭찬이자 질책이었고,
그 사람의 말이 나의 감정이었다.
나는 나를 느낄 수 없었다.
그게 가장 무서운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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