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이야기들

2. 친구라는 이름 아래 주종관계였던 우정

꾸사장 2025. 6. 8. 12:55

그 친구는 늘 강압적이었다.

강하게 말하고, 다그치고, 통제했다.

하지만 나는 그걸 당연하게 받아들였다.

친구니까. '이 정도는 괜찮지'라는

자기 합리화 아래에 숨었다.

친구와의 관계는 일반적인 우정의 틀에서

한참 벗어나 있었다.

 

 

내가 뭘 잘못했는지 몰랐던 건 아니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건 친구가 아니었다.

권력 구조였다. 그리고 나는 그 관계에서 아래였다.

하지만 그땐 몰랐다. 아니, 알아도 애써 외면했다.

 

 

언뜻 보기엔 서로 도움 주고받는 사이 같았지만,

들여다보면 그건 일방적인 '지시'와 '복종'의 구조였다.

그 친구는 늘 당당했다. 늦지 말라고 했고,

입금 날짜를 정해줬고, 어기면 눈치를 줬다.

나는 늘 지켰다. 늦지 않았고,

미루지 않았고, 꼬박꼬박 입금했다.

 

 

그 친구가 말한 기준이 곧 나의 기준이 되어버렸다.

처음엔 나도 친구로서 도움을 주는 줄 알았다.

근데 어느새 나는 매달 돈을 보내고 있었고,

그걸 당연하게 받아들이게 됐다.

친구는 요청했고, 나는 주저 없이 입금했다.

그게 얼마나 이상한 일인지도 자각하지 못한 채.

 

 

입금을 하고 나면 돌아오는 말은 딱 하나였다.

입금할 때 돌아온 건 '땡큐' 한 마디뿐이었다.

감사의 말도, 미안하다는 말도,

받은 만큼 더 열심히 전략짜줄게 라는 말도 없었다.

그런데도 나는 항상 늦지 않게, 정확히 보내줬다.

 

 

쟤가 눈치를 주거나, 늦었다고 뭐라 한 적은 없었다.

근데 난 알고 있었다.

쟤가 강압적인 태도를 가지고 있다는 걸.

그래서 혹시나 늦기라도 하면 혼날까 봐,

내가 또 부족하다는 소리를 들을까 봐,

미리미리 입금했다.

그건 내가 자발적으로 한 행동이라기보다

공포에 가까웠다.

 

 

그게 다였다. 지금 생각하면, 그건 친구관계가 아니었다.

우정의 이름을 썼지만, 실상은 주종관계였다.

고맙다는 말 한 마디가 전부였고,

그조차도 기계적으로 들릴 정도였다.

 

 

나는 감정이 섞인 '고마움'을 바라지도 않았다.

그냥 인정받고 싶었다.

"잘했어"라는 말 한 마디가 그리웠다.

하지만 그런 말은 절대 없었다.

그 사람은 나를 친구로 존중하지 않았다.

나는 순종하는 사람, 시키는 대로 하는 사람,

그리고 무조건 참는 사람일 뿐이었다.

 

 

그 친구는 내가 무언가를 해냈을 때도 인정하지 않았다.

성과를 보여주면 항상 더 해야 한다고 했다.

"이건 누구나 할 수 있는 수준"이라는 말이 돌아왔다.

성과는 깎이고, 노력은 무시됐다.

그 반복 속에서 나는 나의 가치마저 의심하게 되었다.

 

 

사실을 깨닫기까지는 꽤 오랜 시간이 걸렸다.

그리고 그 관계에서 빠져나오는 건

더 오랜 시간이 걸렸다.

그땐 그게 당연한 줄 알았다.

친구라면 서로 성장시키는 게 맞다고 믿었으니까.

 

 

하지만 그건 성장이 아니었다. 무너뜨리는 방식이었다.

내가 자라나는 게 아니라, 눌리는 거였다.

나중에 깨달았다.

이건 친구라는 이름 아래 존재한 주종 관계였다고.

관계는 이름이 중요한 게 아니었다.

그 안에 어떤 힘의 구조가 작동하고 있느냐가 중요했다.

 

 

내가 그 구조를 인식하지 못하고,

순응해버린 것이 가장 큰 문제였다.

내가 입금할 때마다 돌아오는 '땡큐' 한 마디에,

그 관계의 본질이 담겨 있었다.

감사하지 않았다.

고마워하지 않았다.

그저 당연했다.

당연히 받아야 할 걸 받았다는 듯한 말투.

 

 

이제 와서 돌이켜보면, 그건 '거래'였다.

감정 없는, 온기도 없는.

나는 그렇게,

친구라는 이름 아래에서 자신을 잃어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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